향수병이 찾아올 때: 고향이 유독 그리운 날 마음을 달래는 소울푸드

서울에 올라온 첫 겨울, 나는 라면 냄비 앞에서 울었다.

자취방 냉장고에는 대파도, 계란도 없었다. 봉지에 적힌 레시피대로 그냥 끓인 면발을 후루룩 삼키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맛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맛이 아니었다. 냄비 옆에 앉아 “많이 먹어라”라고 하시던 그 목소리였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불빛이 쉬지 않고 깜박였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도시 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이라면, 혹은 한때 그 시절을 버텨낸 사람이라면 아마 안다. 향수병은 ‘고향이 보고 싶다’는 감정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이고, 낯선 도시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 스치는 이상한 고독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가장 먼저 채워주는 것은 언제나 음식이었다.

고향이 그리운 날,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

밥 한 끼가 감당했던 것들

서울살이 초반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지하철 노선도, 은행 업무 처리 방식, 직장 선배와의 술자리 문화까지. 매일 무언가를 배우고, 실수하고, 다시 수습하는 일이 반복됐다. 에너지는 늘 부족했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이 쌓였다.

그런 날이면 나는 종종 고향 음식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된장찌개, 할머니댁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찹쌀 감주, 명절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던 두부조림.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음식들이 그리웠던 게 아니라, 그 음식이 놓였던 식탁이 그리웠던 것 같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도 괜찮았던 그 공간.

도시는 빠르다. 그리고 그 속도에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소울푸드가 필요한 순간은 배가 고플 때가 아니라,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어버릴 것 같을 때다.

향수병이 반복되는 이유

당시의 나는 향수병을 ‘이겨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이 그립다는 것을 드러내면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숨겼다. 직장 동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고향에서 전화가 오면 “잘 지내”라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억누를수록 더 자주 찾아왔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억압된 감정의 반동이라고 부른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쌓인다. 나의 경우에는 그게 특정 음식 냄새를 맡거나, 고향 사투리를 들을 때 갑자기 터져나왔다. 찜질방에서 우연히 들은 경상도 억양 하나에 코끝이 찡해진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향수병이 반복되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도시라는 공간이 우리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빠르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효율, 성과, 적응, 관계. 그 속에서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은 그 질문을 결코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시행착오가 알려준 것들

음식으로 도망쳤던 날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동안 소울푸드를 잘못 사용했다. 힘든 날이면 고향 음식과 비슷한 것을 찾아 먹고, 잠깐 위로받은 뒤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갔다. 해결되지 않은 외로움에 음식을 덮어씌우는 방식이었다.

직장 첫 해, 적응에 실패했다고 느끼던 어느 날 밤, 나는 서울에서 경상도 음식을 파는 식당을 찾아 두 시간을 헤맸다. 찾아낸 식당에서 안동찜닭을 주문하고 혼자 먹으며 ‘이제 좀 나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똑같은 공허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음식이 감정을 해결해 준다고 착각했다. 실제로 음식이 하는 일은 그게 아니었다. 음식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잠시 옆에 앉아 있어주는 것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본질

20년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소울푸드의 진짜 역할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를 잠시 떠올리게 해주는 장치였다. 서울에서의 나는 늘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된장찌개 앞에서는, 혹은 그것과 비슷한 냄새 앞에서는 그냥 집에서 자란 한 아이였다. 그 순간이 주는 안도감은 단순한 미각의 만족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안도감이 오래가진 않아도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밥 한 끼 먹고 나서 갑자기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았지만, 그 밥을 먹은 날 밤은 조금 더 쉽게 잠들었다. 내일을 다시 살아볼 만하다는 미묘한 감각이 생겼다.

소울푸드는 도망치는 수단이 아니라, 충전하는 의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향

지금부터 적용할 수 있는 실천

향수병이 찾아오는 날, 무작정 고향 음식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조금 더 의도적인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나만의 소울푸드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특별한 날만 찾는 음식이 아니라, 지치는 날이면 으레 꺼내드는 그 하나를 정해두는 것. 나의 경우는 서른이 넘어서 집 근처에서 파는 순두부찌개가 그 역할을 하게 됐다. 특별히 맛있다기보다, 그 음식을 먹을 때 내가 나에게 허락을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는.

두 번째는, 먹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혼자 먹더라도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 맛에 집중해보는 것. 음식이 주는 위로는 실제로 ‘먹는 행위’에 있다. 빠르게 배를 채우는 것과, 그 음식을 느끼며 먹는 것은 감정적으로 전혀 다른 경험이다. 당시의 나는 그것을 몰랐다. 늘 다른 무언가를 하면서 먹었고, 그래서 먹고 나서도 채워지지 않았다.

세 번째는, 고향과의 연결을 음식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레시피를 묻는 것, 고향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그 사투리를 듣는 것. 그 과정 자체가 향수병을 채우는 또 다른 방법이다. 나는 한동안 그 전화를 너무 드물게 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인지, 바쁘다는 핑계를 댔던 것인지. 지금 돌아보면 그 전화 한 통이 며칠 치 위로가 됐을 텐데.

오늘도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향이 그리운 날이 오는 것은 당신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다.

도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앞을 보라고 한다.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집, 더 나은 관계. 그 방향은 맞지만, 가끔은 어디서 걸어왔는지를 돌아봐야 다시 제대로 걸어갈 수 있다. 소울푸드는 그 순간의 허락이다. 잠깐 멈추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도 된다는.

그래서 나는 지금도 특별히 지치는 날이면 그 찌개를 끓인다. 두 아들이 먹는 걸 보면서, 이 맛이 언젠가 이 아이들의 소울푸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들도 먼 훗날 어느 도시의 자취방에서 이 냄새를 그리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울푸드란, 특정 음식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았던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무리 낯선 도시에서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다.

오늘 밤 뭔가 허전하게 느껴진다면, 그냥 그리워해도 된다. 그 감정을 굳이 이겨낼 필요는 없다. 고향이 그리운 것은 약함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함께 보면 좋을 글

▶ “혼자 여행, 멋있으려고 떠난 게 아닌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댓글 남기기